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그리고 기술의 혼다.
글 주영삼 / 사진 Kyotography_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일본이 만든 카메라, 게임기, 프라모델, 애니 등이다. 역사가 깊은 것은 물론이고 저력이 있다. 하지만 일본산 자동차 브랜드는 아니다.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자동차를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동차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일본 자동차 브랜드에 푹 빠져버리는 시기가 있다. 첫 번째는 이니셜 D, 사이버 포뮬러 등 니뽄산 레이싱 만화를 접하는 시기이고, 두 번째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탄생한 마쯔다의 RX-7, 닛산의 스카이라인 GT-R, 도요타의 수프라, 혼다의 NSX 등의 매력을 알게 될 무렵이다.
혼다 CR-V. 혼다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는가. 필자는 F1, 기술의 혼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전륜구동으로 가장 빠른 랩 타임을 가지고 있던 시빅 타입 R이 떠오른다. 노재팬을 외치는 시국에 이 차량을 다루는 것이 염려가 되지만 자동차 기자로서 출생만으로 자동차를 미워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설이 길었다. 달려보도록 하자.
차에 올라 빨갛게 각인된 멋스러운 엔진 스타트 버튼으로 녀석을 깨웠다.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클러스터에는 화려한 디스플레이가 연주된다. 마치 결승 전을 앞두고 레이싱 머신에 올라 마지막 결의를 다지는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RPM 게이지가 중앙에 위치한 디스플레이와 스티어링 휠 중간에서 빛나는 혼다의 H 로고를 바라보면 영락없는 F1 머신이다. 하지만 녀석의 심장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부드럽게 세팅된 액셀레이터 페달을 밟아 도로 위로 올라섰다. 녀석의 파워트레인은 1.5 리터 i-VTEC 엔진과 CVT 미션이 합을 맞춰 최고출력 193마력, 최대토크 24.8kg.m의 성능을 발휘한다. 공차중량은 풀타임 4륜구동 모델로 1,620kg이다. 가벼운 몸무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기에 200마력에 달하는 녀석의 동력성능이 궁금했다.
마침 도로에는 차도 없고 그대로 CR-V를 밀어붙여 보았다. 풀악셀과 함께 녀석의 심장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만 달릴 수 있다고 외치는 엔진과 달리 CVT 미션은 우리 페이스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필자도 액셀 페달에 올려놓은 발에서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잘 다듬어진 엔진에 왜 CVT 미션을 적용했을까.. 혼잣말을 되뇌며 크루즈 주행에 돌입했다. 그제서야 녀석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심형 SUV지만 말랑말랑하고 소프트한 서스펜션은 편평비 55의 타이어와 함께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했다. 더불어 노면의 진동과 소음을 잘 억제했다. 또한 풍절음도 고속도로 제한 속도 100km/h 내에서는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차량의 롤링은 지상고가 조금 높은 SUV 치고는 적은 편이다. 다만 차량의 프론트 댐퍼는 강하게 세팅돼 있고, 리어는 좀 더 부드럽게 풀어주어 방지턱 혹은 범프 구간에서 차량의 뒤쪽이 훅 솟는 느낌이 들곤 했다.
다소 아쉬운 동력 성능 그리고 편안한 승차감을 확인했다. 이제는 좀 더 한적한 곳에서 브레이크 테스트를 진행할 차례다.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녀석의 디스크와 캘리퍼를 서서히 달구어 보았다. 쉽게 지치지 않는다. 스트레스 받아 밀릴 만도 한데 밀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달리는 것보다는 서는 것에 재능이 있는 일제인 듯싶다.
강한 브레이킹을 시도하자, 녀석은 브레이크 락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ABS를 작동 시키며 바른 자세로 멈추어 섰다. 프론트의 강한 댐퍼 세팅이 앞머리가 주저앉는 노즈 다운을 적절하게 제어했고, 잘 세팅된 후륜 멀티링크 서스펜션은 차량의 리어가 춤추는 피쉬테일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주었다.
이제 유턴을 하고 커브길을 돌아나가면 녀석을 담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다. 밤이 깊어 오가는 차량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CR-V의 4륜 트랙션을 테스트해볼 참이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핸들을 좌로 감으며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순간 차량의 머리는 안쪽으로 뒤는 바깥쪽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 나갔다.
녀석은 전륜구동 기반의 4륜 모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동력을 적극적으로 리어 휠로 배분했다. 이어지는 커브길에서도 뉴트럴에 가까운 코너링 성향과 민첩한 스티어링 휠 반응을 보여주며 스포티하게 빠져나갔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아쉬웠던 가속 성능과는 반대로 눈이 많이 쌓인 날 공터에서 CR-V를 가지고 도넛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코너링 성능과 4륜 느낌은 발군이다.
영하의 날씨에 차에서 내리기 싫었지만, 이내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손에 쥐고 나와 녀석을 바라보았다. 첫인상은 영락없는 건담이다. 일본 만화에 나오는 로봇처럼 굵은 선을 사용해 투박하지만 실제 크기보다 더욱 웅장해 보인다. 정면에는 블랙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 하단에는 LED 안개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치켜뜬 헤드램프와 커다란 혼다 엠블럼은 현시대의 혼다를 비춘다.
프론트 범퍼에서 보닛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이와 더불어 볼륨감 넘치는 펜더를 적용해 우아함을 부여했다. 반대로 A 필러에서 루프를 지나 트렁크 리드까지 이어지는 라인은 직선에 가까워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이로 인해 측면 디자인은 미래지향적이면서도 보통의 것과는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은 헤드라이트 밑으로 툭 튀어나온 범퍼가 불독의 부정교합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블랙 하우징 LED 테일램프 역시 전면부의 헤드라이트 형상처럼 화가 난 듯 위로 솟아 있으며, 테일램프 사이에는 다크 크롬 가니쉬를 적용해 강인함을 완성했다. 여기에 범퍼 하단부에는 윙 타입 실버 로어 가니쉬와 사각형의 머플러를 적용해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뒤태를 보완했다.
문을 열고 다시금 차에 올라탔다. 조금은 올드하고, 단출한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온다. 색상은 블랙으로 가득 찬 가운데 우드가 포인트가 된다. 인테리어 소재는 가죽, 우레탄 그리고 플라스틱이다. 전반적인 느낌은 좋게 말하면 심플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급스럽지 못하다.
스티어링 휠은 3포크 타입이며 다양한 스위치 버튼이 달려있다. 재질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져 있고, 핸들을 감싸 쥐었을 때 기분 좋은 두께이다. 또한 버튼 조작성도 직관적이라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기어 노브가 일반 차량과 달리 센터페시아 앞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로 인해 센터 터널 부위의 공간 활용도가 조금 높다는 것이다. 다만, 운전 시에 이와 같은 방식이 편리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이 밖에 패널이 돌출되는 방식의 HUD는 시인성이 나쁘지 않으며, 7인치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는 무난한 조작감과 함께 조수석 사이드 미러 아래에 장착된 측 후방 카메라 영상을 운전자에게 전달해 주행 및 주차 시 안전을 돕는다.
뒷자리로 자리를 옮기면 앞에서 언급했던 애매한 부분들이 잊힌다. CR-V의 가장 큰 장점인 넓은 실내 공간을 느낄 수 있다. 레그룸과 헤드룸 공간에는 불만을 갖기 힘들고, 뒷좌석 등받이 각도도 적당히 기울어 착석감도 괜찮은 편이다.
폴딩은 따로 평탄화를 진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에 가깝게 접힌다. 폴딩 진행 후 차박을 가정해 키 178cm인 필자가 직접 누워보았으나, 불편함을 느끼기 힘들었다. 건담을 떠올리게 하는 미래지향적인 익스테리어 대비 올드한 인테리어는 마음에 걸렸으나, 이는 넓은 실내 공간으로 퉁 칠 수 있다고 본다.
CR-V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자연스레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살아생전 “못하겠다”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는 뼛속까지 엔지니어였던 혼다 소이치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술 제일주의’는 아직도 혼다가 엔지니어 출신만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있는 이유다.
혼다 CR-V는 고성능 SUV가 아니다. 고급스러움과도 거리가 멀고 다양한 첨단 안전장치를 품고 있지도 않다. 다만 잘 서고 잘 돌아나가며, 멋스러운 외모와 넓은 실내 공간 그리고 혼다의 정신이 깃든 ‘기본기’를 무기로 하는 자동차다.
CR-V라는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은 어쩌면 혼다의 ‘기술 제일주의’ 정신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믿고 보는 배우처럼 믿고 타는 브랜드 혼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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