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외모로 다가와 거칠게 속삭이다.
글 주영삼 / 사진 Kyotography_
‘찝차’를 아는가.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SUV’라는 단어는 그리 많이 통용되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던 ‘찝차’라는 명칭이 SUV 차량을 일컫는데 주로 쓰였다. 찝차는 본래 ‘JEEP’라는 자동차를 의미하는데 이 모델은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때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 독일은 탁월한 기동성을 자랑하는 G-5 군용차를 전면에 세워 전장터를 지배한다. 이에 미국은 독일 차량에 대응할 수 있는 군용 자동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미국 내 자동차 회사를 대상으로 공개입찰을 진행한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프의 전신인, 윌리스 오버랜드사의 ‘쿼드’ 모델이 작전 차량으로 선정된다.
이후 윌리스 MA, 윌리스 MB 등의 차량이 개발됐고, 이 모델들은 전쟁터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JEEP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 즉 지프라는 브랜드 혹은 자동차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태생부터 거칠고 남성적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라인업에 브랜드 이미지와 동떨어져 보이는 녀석이 있다. 바로 지프 레니게이드다.
철이 지나 서랍장 깊숙이 넣어둔 카키색 야상을 꺼내어 걸쳐 본다. 그리고 그 옆에 꼬깃꼬깃 구겨져 있는 카모 바지도 꺼내 입는다. 어딘지 모르게 심심해 보이는 패션은 검은색 벙거지 모자와 밑창이 다 닳은 갈색 워커로 완성한다. 이거면 됐다. 녀석을 타기 알맞은 의상이다.
생긴 게 영락없는 찝차다. 둘러보는 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차에 올라타 시동부터 걸어본다. ‘트드드드 크렁!’ 지프 특유의 스타터모터음과 함께 녀석이 거친 숨을 내뱉는다. 엔진 회전 질감이 거칠다. 디젤 차량의 그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가솔린 엔진이 주는 필링도 아니다. 서둘러 출발하고 싶은 마음에 악셀을 힘주어 밟는다. 이상하다. 레니게이드가 터보차였나. 토크의 곡선이 마치 과급기 엔진을 사용하는 차처럼 느껴진다.
레니게이드의 파워트레인은 2.4리터 자연흡기 엔진과 9단 자동변속기가 조화를 이루어 최대출력 175마력, 최대토크는 23.5kg.m의 성능을 발휘한다. 최대토크의 경우 제원상 3,900rpm에서 발생한다고 하는데, 체감상으로는 4,000rpm이 넘어야 준수한 가속감을 느낄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최대토크가 발생하는 때와 그렇지 않은 때의 가속력 차이가 꽤나 큰 편이다.
변속기는 9단 자동변속기를 사용하는데 변속 시 이질감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낮은 rpm에서 기어를 업시프트한다. 급가속 시에는 재빠르게 다운시프트를 해주는 편이고, 6천 rpm 부근에서 변속이 된다. 아쉬운 점은 매뉴얼 모드로 조작 시 다운시프트의 반응이 느리다. 이 차량의 성격을 볼 때 엔진 브레이크 용으로만 활용해야 할 듯싶다.
가다 서다를 반복할 무렵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차해 있다가 출발을 위해 악셀 페달을 밟으면 차가 울컥거리면서 나아가는 증상을 보였다. 몇 번을 테스트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원인은 페달에 있었다. 레니게이드의 악셀 페달에는 유격이 존재한다. 4mm 정도까지는 페달을 밟아도 스로틀이 전개되지 않는다. 때문에 운전자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좀 더 깊이 밟아 차가 울컥거린다고 느낄 수 있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적응 전에는 조금 신경을 써야 한다. 브레이크 페달은 이러한 문제가 없다. 페달의 답력은 부드러운 편이고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제동력을 걸어준다.
승차감의 경우 굉장히 편안한 편이다. 요즘 출시되는 많은 도심형 SUV가 세단에 가까울 만큼 서스펜션이 단단하게 세팅되는 것에 반해 녀석은 소프트함에 진수를 보여준다. 레니게이드를 운전하면서 내내 든 생각은 ‘운전하기 편한 차’였다. 스티어링 휠의 감도는 가볍고 부드러운 서스펜션 세팅은 노면이 고르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진동을 운전자가 느끼지 않도록 해준다. 또한 220mm의 달하는 지상고는 규정을 무시하고 대충 만든 과속방지턱도 신경 쓰지 않게 해주었다.
물론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세팅은 양날의 검이다.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에 둔 높은 차고와 감쇠력이 낮은 서스펜션은 급브레이킹 시에 노즈 다이브(차체 앞부분이 고꾸라지는 현상)를 유발하고, 급가속 시에는 스쿼트(차체 앞부분이 뜨는 현상)를 두드러지게 한다. 또한 주행 간에 스티어링 휠을 좌우로 흔들 경우 무지막지한 롤링도 경험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일상 주행 영역에서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 증상이다.
그렇다면 자율주행 기술은 어떠할까. 아쉽게도 테스트하지 못했다. 시승 차량은 레니게이드 리미티드 전륜구동 모델로, AWD 모델에 적용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차선 유지 보조 장치 그리고 전방 추돌 위험 시 브레이크 작동 등의 다양한 반자율주행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녀석은 지프니까. 아날로그 그리고 날것의 매력으로 타는 차니까.
그렇게 한참을 달려 필자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녀석의 미적 요소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갈대밭이 우거진 비포장도로에 주차를 하고 내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감상했다. 누가 봐도 찝차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 군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자주 보던 레토나의 실루엣이다. 물론 그 시절에 나온 군용 차량들은 모두 지프의 룩을 따랐다.
전면에는 지프를 상징하는 ‘세븐-슬롯’ 라디에이터 그릴과 원형의 LED 헤드램프를 적용해 지프 가의 핏줄임을 증명한다. 무심히 바라보면 작은 랭글러를 보는 듯하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오프로드 타이어를 장착해도 무리가 없을 큰 펜더와 어디든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앞뒤로 짧은 오버행이 눈에 띈다. 그리고 펜더에는 볼륨을 잔뜩 주어 작은 차체를 보완했다.
후면부는 강인한 인상의 전면부와 달리, 여심을 홀릴만한 트렌디하고 귀여운 형상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여심 저격’이다. 매끈하게 일자로 떨어지는 트렁크 라인과 어두운 밤에도 불빛 형상만으로 레니게이드임을 알 수 있는 X자가 새겨진 귀여운 리어램프가 돋보인다. 아. 이 램프 형상은 윌리스 MB의 보조 연료통에서 모티브를 얻은 디자인이다. 또한 범퍼 하단에 자리 잡고 있지만 색도 다르고 역할도 다른 안개등과 후미등은 레니게이드만의 차별점이다.
한껏 멋을 부린 외관과 달리 실내는 군용 출신답게 투박하고 심플하다. 실내에는 플라스틱, 우레탄 그리고 가죽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으며, 색상은 블랙을 사용하여 심플한 멋을 추구했다. 스티어링 휠은 적당히 굵어 그립감이 좋고, 기어노브는 늘씬하게 뻗어 있어 잡는 맛이 일품이다.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조수석 대시보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오프로드용 손잡이가 되시겠다.
2열 공간도 넉넉하다. 178cm인 필자 기준으로 운전석을 세팅하고 착석하여도 충분한 레그룸과 헤드룸이 확보된다. 아쉬운 점은 2열 폴딩 시 평탄화가 되지 않는다. 차박을 원한다면 애프터마켓 용품을 이용해 조절을 해야 하며, 차량의 사이즈로 보아 키가 큰 남성은 조금 불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녀석을 음미해 본다. 인간을 해치기 위해 달리고 달렸던 전쟁의 산물. 시간이 흘러 녀석은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모든 고민은 잠시 접어 두고 이 매력적인 ‘찝차’와 함께 무작정 자연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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